동문오피니언
원현린(75회) 칼럼/계절을 속일손가?(퍼온글)
본문
퍼온곳 : 기호일보(25. 8.27)
계절을 속일손가?
/원현린 주필
원문
https://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56776
원현린 주필
기상청이 어제도 오늘도 폭염주의보를 발령했다. 역대 여름 기온의 최고치를 연일 경신하는 올여름이다.
절기(節氣) 개념도 이제는 바뀌어야 할 듯하다. 입추(立秋), 처서(處暑)가 지났는데 여전히 꺾일 줄 모르는 무더위로 가을이 무색하다. 계절의 흐름이 멎은 것인가. 가을의 전령사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릴 법도 한데 뜰 앞 정원 숲속에서는 여전히 매미 울음소리만 높다.
기온 측정기가 없던 시절, 옛사람들은 여름철 무더위 정도를 시문(詩文)으로 남겼다. 「고문진보(古文眞寶)」 등에 보인다. 예전에도 요즘 더위와 다를 바 없었던 듯하다.
“축융(祝融)이 남쪽에서 와 불의 용(龍) 채찍질하니, 불꽃 깃발 활활 하늘에 붉게 타오르네. 해가 중천에 떠 있어 엉겨 붙고 떠나지 않으니, 수많은 나라 붉은 화로 속에 있는 듯하여라.
오악(五嶽)의 푸른 초목들 마르고 구름의 채색도 없어지니, 양후(陽侯)는 바다 밑에서 물이 마름 근심하네. 언제나 하루 저녁에 금풍(金風)이 불어와, 나를 위해 천하의 열기 씻어줄런지.“
당나라 시인 왕곡이 한여름 더위를 읊은 노래 ‘고열행(苦熱行)’이다. 시어 중 ‘축융’은 화신(火神)으로 불을 뜻한다. ‘양후’는 파도의 신(神) 이름이다. ‘금풍’은 가을바람이다. 문장에서 보이듯 하늘은 염천(炎天)으로 온 나라가 뜨거운 화로 속에 놓일 정도라 했다. 게다가 극한 가뭄으로 파도의 신마저도 바닷물이 마를까 걱정한다는 표현에서 당시 더위가 짐작된다.
고려 문인 이규보도 여름 더위를 넘기느라 고충을 겪은 모습이 보인다. “혹독한 열기와 화기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네. 온몸에 붉은 반점 솟아 피곤하여 바람부는 난간에 누웠다오. 바람이 불어와도 더워 열기를 부채질하는 듯, 목말라 물 한잔을 마시니 물도 끓는 물과 같구나.”
우물물 한잔을 마셔도 펄펄 끓는 물과 같다고 표현할 정도다. 시구만 봐도 800년 전 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느껴진다.
조선조 권근도 “음양은 숯이 되고 천지는 화로이니 하늘 가득 화기(火氣)가 공중에 엉겨 있네”라는 문구를 남겼다.
몇 해 전 태평양 한복판에 떠 있는 하와이 제도 가운데 한 섬인 마우이(Maui)에 다녀온 적이 있다. 마우이에 가면 지상에서 가장 크다고 알려진 화산 분화구가 있는 할레아칼라산이 있다. 지금은 휴화산으로 높이 3천55m에 분화구 원주만도 32㎞가 된다. 뉴욕 맨해튼과 맞먹는 거대한 분화구다.
전설에 따르면 천지창조 이후에 이곳에서는 태양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바람에 낮의 길이가 짧았다. 때문에 주민들은 일할 시간이 부족했다. 섬의 신(神) 마우이가 주민들의 고충을 듣고 낮 시간을 길게 하기 위해 분화구에 올라가 덫을 놓아 태양을 붙잡아 뒀다. 그리고는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태양신에게 낮 시간을 길게 할 것을 요구했다. 마우이는 태양신으로부터 섬 위를 천천히 지나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태양신은 할레아칼라산 정상에 자신의 안식처 ‘태양의 집(House of Sun)’까지 마련했다. 이때부터 한밤을 제외하고 연중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마우이섬이다.
올여름 충분히 태양빛을 받아 쬔 우리다. 산 정상에 잡아 놓았던 태양신도 이제 그만 놓아 줄 때가 됐다. 언젠가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마우이 전설이지만 불의 신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다시 한번 소환해 봤다. 벽에 걸린 달력을 보니 밤에 기온이 내려가고 대기 중의 수증기가 엉켜서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연해진다는 백로(白露)가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철지난 무더위 있다 한들 계절을 속일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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